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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사랑

마이너리그에 찾아오신 하나님: 룻기 읽기 3

 

마이너리그에 찾아오신 하나님: 룻기 읽기 3 

written by Rev. 최현호

룻기 3장: 캔디와 키다리 아저씨

 

룻기 3장 1~16절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a.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베들레헴에서의 삶은 고단한 일상. 이삭을 주워 연명한다. 거지같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날이 지나도 삶은 발전하지 않고 다시 힘겨운 이삭 줍는 전선에 나서야 한다. 그 반복이었다. 쉽게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이 고비다. 하지만 그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이삭줍기에 뛰어드는 룻. 시어머니를 부양한다. 키다리 아저씨는 룻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가왔다.

우리의 현실을 부정하지 말고 인정해야한다. 그것이 싫은 것일지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시작은 일상으로부터 나간다. 신앙 생활은 구름 위로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신앙 생활의 90%는 일상의 반복을 잘 살아내는 것으로 채워진다. 그 일상이 고단하고 지치고 그런 삶일지라도. 신앙 생활은 대박을 노리거나, 대박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b. 키다리 아저씨

외로운 룻에게 후원자가 나타난다. 그의 이름은 보아스. 베들레헴 지역에서 여러모로 명성이 높은 자였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라기보다는 지후선배에 가까운 인물. 그가 룻을 바라본다. ‘저 소녀는 누구냐, who is that girl?’ 보아스는 어떤 모압인 며느리가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베들레헴에 와서 열심히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왔던 터였다. 그 여인이 바로 룻이라는 것을 지금 보게되었다. 그가 룻에게 호감을 갖고, 그녀를 후원함으로써 비전이 없는 땅 베들레헴은 하나님이 계시는 땅으로 룻에게 다가온다.

내가 걷는 척박한 땅에서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발견할 것인가. 거저 굴러들어오는 행운이 아니다. 현실에 기반한 영성이 필요하다. 일상을 살아가는 예배자로 나아갈 때, 비전이 없는 땅은 약속의 땅이 된다. 교회에 올 때만 예배자가 아니다. 짜증나고 답답한 일상 속에서도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 때,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다.

c. 운명의 러브라인

보아스가 사적인 감정을 담아 룻을 특별히 챙겨준다. 먹을 것, 가져갈 것도 더 준다. 아직 보아스에게 룻은 이방인 소수자로서 보호받아야할 대상, 효심 갸륵한 여인으로서 기특함의 대상일 뿐일 수도 있다.

보아스는 원래 엘리멜렉 가정의 기업을 무를 사람 2순위 후보에 해당하는 남자였다. 1순위에 해당하는 자가 기업을 무르지 않는다면 선택권은 보아스에게 있었다. 그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를 표하고 있다.

왜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셨을까에 대한 단서를 추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인도하신다는 확신과 인식이 없다면 일상은 우리에게 고통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수렁 속에 빠져있을지라도 지금 나를 이 가운데로 두신 이유와 또 인도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고 붙잡아야 한다. 때때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늦게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볼 때, 나오미와 룻은 모압에서의 이민이 실패했기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어쩔 수 없이 온 것이지만 그들의 가정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먼저 있었던 것이다. 모압에서의 실패는 룻과 나오미에게 절박한 마음을 주었다. 룻에게 시어머니의 절망을 함께 지고 낮은 모습으로 억척스럽게 그의 일상을 살아내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보아스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룻과 보아스와의 만남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다. 운명적인 러브라인이었다. 단순히 청춘극장으로서의 러브라인이 아니라 쇠락해가는 가정을 회복시킬 운명의 러브라인이었던 것이다.

 

정리

 1.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신앙의 열심을 티내지 말고 적당히 살라고 유혹한다.

2, 그러나 세상의 원리에 동조했을 때, 우리는 본래의 신분을 망각하게 된다. 거룩한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3. 하나님을 따르는 삶은 비전이 없어 보이는 길이지만, 누군가의 절망을 나눠지고 낮은 자리로 낮은 모습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4.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대박의 삶이 아니라 일상의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룻이 처했던 상황같이 답답하고 고단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