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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사랑

마이너리그에 찾아오신 하나님: 룻기 읽기 2

 

마이너리그에 찾아오신 하나님: 룻기 읽기 2 

written by Rev. 최현호

룻기 1-2장: 우리들의 삶의 무대

 

2. 비전이 없는 땅, 베들레헴

룻기 1:6-7,15-21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a. 뒤죽박죽이 된 계획

이제 어찌됐건 다시 살기위해 죽은 남편 소유의 땅이 있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오미. 베들레헴에 가서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한다. 그 곳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땅이니까. 두 며느리에게 고향 신에게 돌아가라고 한다. 새 남편을 찾으라고 한다. 두 며느리를 저주의 길로 포기하면서까지 자기 한 몸 부지하기 바쁘고 너무나 어렵다. 망했다. 세상에 물려 당황한 그의 척박한 영혼을 본다.

 

b. 나오미의 절망: 하나님이 없다.

여기 나오는 할머니의 파워풀한 절규를 보라. 자기 이름을 바꾼다.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했다. -->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 있는가 괴로워하고 있다. 자해하는 것과 같다. 이름을 마라라고 바꾸면 하나님이 마음 아파할까봐. 하나님 내 이름이 마라입니다. 내 이름이 고통이고, 씁니다. 그만큼 나오미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보다 분노와 원망이 앞서 있다.

 

c. 절망을 함께 지고 가는 룻

그런데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머리가 나쁜 건지.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허락에도 굳이 망한 집안의 과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오겠다는 룻이 부각된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와도 죽은 남편의 땅을 무조건 상속할 수는 없다.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주며 그 땅을 상속해줄 친척 남자가 허락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마음 좋은 사람이 두 과부를 부양하면서 죽은 엘리멜렉의 땅을 그들에게 쉽게 주려고 할 것인가. 베들레헴은 비전이 보이지 않는 땅이었다. 하지만 룻은 굳이 그 곳으로 가려고 한다. 시어머니의 절망을 함께 나눠지고.

룻이 하나님을 잘 안다고 볼 수 없다. 아직은 그냥 시어머니의 종교에 따르겠다는 수준이다. 인간적인 정과 의리에 의해서 나오미와 베들레헴을 선택했다.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이 남다른 선택은 나오미 혼자가 아닌 그녀의 가정이 하나님을 섬기는 땅으로 가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d.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존재하시는가?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과 갈등, 절망 앞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는 우리가 있다. 니오미와 같이.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땅은 현실 속에서 비전이 없는 땅이다. 하나님만 붙들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뒤로 밀려나기 쉬워 보이는 세상이다. 하나님께 우선 순위를 두면 현실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고, 헌금을 하고 교회를 섬기다보면 가정을 돌볼 돈과 시간이 남들보다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절망을 나눠 지고 가는 여정이었다. 절망을 나눠져야만, 절망을 업고 가야만 볼 수 있는 비전이 있는 곳이었다.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어떤 절망을 업으면서 베들레헴으로 가야하는가? 내가 속한 가정의 절망인가? 내가 속한 교회의 절망인가? 내 곁에 있는 이들의 절망인가?

세상과 다른 선택으로, 낮아지는 자리로 낮아지는 모습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베들레헴의 비전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