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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사랑

[책을 스캔하다] 차마 신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3장 기독교의 참 모습>

 

 

 

 

차마 신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인터넷 안에서 하나님과 교회, 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혹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책내용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장 기독교의 참 모습>

 

 

 

 

 

#하나님에 대해서

 

 

기독교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그분은 온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다.

태양과 지구, 인간과 동식물 등 모든 것을 지으시고 인간을 만물의 으뜸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다.

다섯 살배기 아이가 부모없이 생존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삶을 영위해 나갈 수는 없다.

아이에게는 진정으로 사랑하며 키워 줄 부모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형편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무척 사랑하신다.

인간을 창조한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사랑 어린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만드시고 자유 의지를 부여하셨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을 수도 있었고, 따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은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겠다는 결정이고,

따 먹지 않는 것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순종의 표시였다.

만약 선악과 대신 "태양을 만지지 말라"는 기준을 주셨다면,

이것은 오직 복종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인간에게 명령하지 않으셨다.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다 먹을 수 있다는 전제를 두고,

한 나무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의 기준을 정해 놓고 만일 불순종하여 어길 때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부모가 아이에게 "날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내 손을 꼭 붙잡아. 놓치면 큰일 난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어느 날 바위가 계란에게 "야, 덤비지 마. 나에게 부딪히면 너는 죽어"라고 말한다.

그런데 계란이 마음을 먹고 바위에게 덤벼들고, 그만 박살이 나고 만다.

이런 경우, 바위가 화가 나서 계란을 부순것이 아니다.

계란이 바위에게 덤빌 때 이미 그 자체가 파멸의 원인이 된 것처럼,

생명과 사랑의 근원인 하나님께 대항하면 인간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게 된다.

 

 

 

창세기 3장에는 인간이 사탄의 꾀임 (물론 지금 당장 악마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에

빠져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는 내용이 나온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인간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하듯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경하며 그분께 순종했는데,

인간이 자발적으로 이 관계를 깨고 말았다.

그 후 지금까지 이런 상태가 지속되고 있고, 인간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다른 영역을 만들어 살고 있다. 성경은 이런 상태를 죄라고 지적한다.

 

 

 

 

 

# 인간에 대해서

 

 

 

인간의 모습을 살펴보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된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바로 이것이다. 왜 인간은 불완전할까?

바로, 완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이 땅에서 대략 80년 정도 살다가 죽는다.

인간은 원래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였으나 타락 이후 죽어야 할 운명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땅에는 전쟁과 홍수, 지진과 기근이 있으며 고통이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그럴까?

 

 

우리가 지금 낙원을 떠나 고통의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나온 이곳에는 외적으로 지진과 기근, 홍수, 해일, 태풍이 있고 갖가지 병도 많다.

또 내적으로는 여러 가지로 부패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여러가지 문제 (친구간의 배신, 부부간의 불화, 고부간의 갈등, 회의, 자기 연민,

자기 혐오, 삶의 무목적성, 고독감, 폭력, 성적인 문제 등)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거짓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인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셨다.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 (마가복음 7장 21~23절)

 

 

인간은 도덕적 불감증에 걸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는지 모르고 그것을 즐긴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각하게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지적했다

(예레미야 17장 9절)

 

 

 

 

 

 

 

석가모니는 인생의 모습을 '고해'라고 표현했고, 성경은 인생을 '수고와 애씀'으로 묘사한다.

인생의 황금기인 청년 시절에도 많은 갈등과 문제가 있는데 점점 노쇠하고 병들어갈 때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할까?

 

 

사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만족을 추구한다.

계속 끊임없이 다음 만족을 향해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인간 관계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문제들이 미로처럼 펼쳐지고,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마음은 늘 불안과 갈등으로 뒤엉킨다.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무엇인가 만족할 만한 목표를 좇아가지만, 인간에겐 늘

채워지지 않는 빈 구멍이 있다.

 

인간은 결국 다 죽는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백한 진리다.

죽음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보면 인간은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점을 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미래를 알 수 없는 인간이 초월적 존재를 의식하고

의지하려는 본능적 갈망을 지니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다.

 

 

 

사람들은 보통 '선한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고 '악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선한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누가 정한 것일까?

아무도 쉽게 풀 수 없는 이런 골치 아픈 문제를 이제는 정리해야 한다.

인간은 구원받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생의 실존에 대해 '인간이 하나님을 벗어났다'고 설명한다.

부모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쉽게 거짓말을 한다.

인간들이 모이면 갈등과 싸움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무가 땅에서 뽑혀 나온 상태 즉 하나님을 떠나 가출한 인간의 상태,

자기를 지으시고 사랑하는 그분을 박차고 나온 인간의 상태를 성경은

'죄에 빠져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고, 근본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엄마 꽂게가 아무리 새끼 꽂게에게 '똑바로 걸어야지'라고 해도 꽃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옆으로 걷는것처럼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음란한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우며 미워하는 마음을 고칠 방도가 없다.

옛날 많은 성현들도 이런 문제들 때문에 자기 수양과 고행의 길을 택했던 것을 생각해 보라.

신학자 마르틴 루터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의 죄악을 씻어 보려고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며 잠도 안 자고 고행을 했다.

또 스님들도 죄를 없애려고 얼마나 노력하는가?

음욕을 없애려고 정신을 통일하며 도를 닦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에는

여전히 음욕이 있고 교만이 있다. 죄성은 지울수도 고칠수도 없다.

 

반면에 하나님은 철저히 공의로운 분이다. 미움, 음란함, 시기, 악독, 기만 등 모든 죄에 대해

벌을 내리신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 남은 일은 심판과 파멸을 당하는 것뿐이다.

 

 

 

 

# 예수에 대하여

 

 

인간의 죄 문제에 대해 다른 종교에서는 어떻게 말할까?

불교를 포함한 일반 종교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너희는 도대체 나이가 몇살인데 아직도 콧물을 흘리느냐? 기침도 많이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낫겠느냐? 우선 콧물이 나면 휴지를 사서 하루에 세 번씩 닦아라.

그리고 기침이 나면 배에 힘을 주어라. 평소에 복식호흡을 해라.

1년쯤 지나면 기침의 횟수가 40번으로 줄고 5년쯤 지나면 30번으로 줄다가 어느 날 기침이 그칠 것이다."

 

반면 기독교의 설명은 이렇다.

"콧물을 닦아 보아라. 또 나오지 않느냐? 감기에 걸렸기 때문에 아무리 닦아야 소용없다.

그러지 말고 병원에 가서 감기를 치료해라."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인간의 모순성을 지적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하지만 성격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돌아오라. 창조주께 돌아오라. 이것이 구원이고 생명이다."

 

그분께 돌아오면 인간은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된다.

 

 

 

 

 

 

 

 

# 인간의 숙제

 

 

 

하나님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세가지 큰 어려움을 안고 있다.

 

첫째, 인간은 신을 알 수 없다.

인간은 이미 더럽혀진 죄인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인간은 이미 죄 안에 갇혀 있어서 하나님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빛과 어두움처럼 도저히 함께 거할 수 없다.

둘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모른다.

 

둘째, 신을 안다 하더라도 신 앞에 나아갈 길이 없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은 그 앞에 설 수 없다.  

신을 안다 하더라도 나아갈 길이 없다면 차라리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때가

더 나을 것이다. 신이 있음을 알았으나 그 신에게 나아갈 길이 없을 때 얼마나 힘들까?

 

셋째, 의심이 생긴다.

현실적인 삶에 익숙한 우리 인간은 초자연적인 신에 대해 들을 때 본능적으로 의심이 생긴다.

 

 

이런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 인간은 구원받을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이 구원 문제가 풀리지 않은 채 늘 미루어져 온 것이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구원받기 전 인간의 근본적인 실존이라고 지적한다.

세 가지 이유 즉 신을 알 수 없고, 혹 안다 해도 나아갈 길이 없으며,

또 누군가 알려 주어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은 대책 없이 멸망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 하나님의 해답

 

 

그런데 하나님께 문제가 생겼다. 공의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되 죄인은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인간들의 죄를 용서할 수 없지만 그들을 사랑하신다.

이런 딜레마의 해결 방도를 찾던 하나님은 드디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의 해결책은 인간이 갖고 있는 세 가지 어려움을 푸는 것이었다.

첫째 하나님이 있음을 알려 주어야 하고, 둘째 구원받을 길을 주어야 하고, 셋째 의심을 풀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 주기로 결정하셨다.

그래서 먼저 이스라엘이라는 한 족속을 통하여 하나님이 존재함을 알려 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류를 위해 길을 만들어 주셨다.

죄로 인해 형벌 받아야 할 인간들을 위해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고 죽으심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이집트와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 강력한 국가들의 흥망성쇠가 거듭되었는데,

이 시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통해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을 방문한다고 알려 주셨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분이 올 때에는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는 나사렛에서 자라다가 죽게 되는데 강도들 틈에서 죽어 부자의 묘실에 장사될 것이다" 등

300개가 넘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주어졌다.

"앞으로 올 것이다. 올 것이다. 그분이 온다. 온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찾아오리라는 예언이 계속되다가 마침내 신구약 중간기에 거쳐

메시아 출현 바로 직전에 마지막으로 예언자 세례 요한이 나타났다.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실 이가 바로 그분이다"라고 주장했다.

 

드디어 기원전과 기원후를 가르며 역사 속에 예수가 등장해서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가 병든 자를 치유하고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며 나병 환자를 고치고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반면 그를 시기했던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주장하는 예수가 신성을 모독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예수는 이 땅에 와서 공개적으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했다.

 

하나님의 아들 개념은 인간의 가족 개념에서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와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곧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분으로 인정하기가 곤란해진다.

예수님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대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와 같은

높은 도덕적 교훈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죽으러 왔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통해서 구원받아야 한다. 나의 아버지가 나를 보냈고 나는 하늘로부터 왔고 나를 믿어야 생명을 얻는다"

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를 둘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니면 거짓말쟁이인가?

 

 

 

 

# 죄인의 구원

 

 

 

 

우리 인간이 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알려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셨다.

'죄인이 구원받는 교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실망스럽지 않은가?

당연히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구원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이를 구원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선한 사람만 구원받는다면 우리 인간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

인격 수양을 많이 하거나 신앙 생활을 오래 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하나님은 한 사람이 대신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용서 받는 방법을 택하셨다.

하나님은 공의롭기 때문에 죄를 그냥 간과 할 수 없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인간을 멸망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인간을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인간에게 구원을 주셨다.

그럼에도 이 구원을 이해하기는 참 어렵다.

'죄인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우리 정서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훨씬 전인 구약 시대부터

여러 제도적 모형을 통해 이 구원의 원리를 가르쳐 주셨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죄를 범하면 소나 양같은 짐승을 잡아서

안수하여 그에게 죄를 전가하는 의식이다. 원래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그 짐승에게 자기 죄를 안수하고 대신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바쳐진 소나 양을 대속물이라고 불렀다.

 

예수가 이 땅에 왔을 때, 세례 요한은 그를 가리켜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라고

설명했다. 이는 예수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 바쳐질 대속물이라는 뜻이다.

 

 

 

제사 모형의 극치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유월절 사건이다.

유월절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이 약 430년간 이집트의 노예로 고통스럽게 살 때 모세라는 인물이

이집트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낸 사건이다(BC1300년경).

당시 모세가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킬 것을 요구하였는데,

파라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렸고, 꿈쩍도 않던 파라오는

마지막 재앙(이집트에 있는 모든 맏아들과 가축의 첫 새끼를 죽이는 재앙)을

당하고서야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주었다.

하나님이 그런 재앙을 주신 것은 파라오의 마음속에 있는 완고한 고집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으면 열 번째 재앙이 내린다고

경고했음에도 이집트 왕은 끝내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왕의 아들을 비롯하여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이 죽게 되는 비참한 일이 벌어졌다.

 

 

이 일이 있기 전 이스라엘 백성은 집 문기둥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는 명령을 받았고,

재앙을 내리는 여호와의 사자는 그 피를 보고 이스라엘의 백성의 집을 건너뛰어 갔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의 맏아들은 죽음을 면하고 살아났다.

이를 기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대대로 지키고 있다.

유월절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어린 양의 피가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죄 때문에 죽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으면 죽음을 피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월절에 돌아가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성경은 "그 날이 유월절 준비일이므로,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그냥 두지 않으려고,

그 시체의 다리를 꺾어서 치워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요한복음 19:31)라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월절은 큰 명절이기 때문에 그들은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고

다리를 꺾어 치워 달라고 했다.

당시 죄수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는데, 죄수들이 십자가에 매달리면 축 늘어져 숨을 못 쉬게 된다.

이 때 로마 군병들은 혹시라도 숨이 붙어 있을까 봐 망치로 무릎 뼈를 부수었다.

예수의 경우도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우려고 했는데,

확인해 보니 이미 죽어 있어서 뼈를 꺾을 필요가 없었다.

구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킬 때 제물의 뼈를 꺾지 않는 규례를 지키게 되어 있었다.

(출애굽기 12:45, 민수기 9:12)

이 모든 것을 목격한 요한은 구약에 예언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였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19:36)

 

 

또한 구약에는 성막 제도가 있어 그리스도의 대속을 미리 예시하였다.

유대인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 있고 둘 사이에 무거운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서 인간이 들어가면 죽는 곳이었고,

오직 1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곳이었다.

대제사장은 속죄하는 동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는데,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함부로 나아가지 못함을 알려 준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운명할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마태복음 27:51).

이는 예수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 준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유명한 구절이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3:16)

 

 

 

 

구원받는 조건이 너무 쉽기 때문에 오히려 믿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러나 원래 너무 값진 것은 값없이 받기 마련이다.

공기, 햇빛, 심장, 생명.....

 

 

우리 인간이 아무리 선하게 보여도 근본적으로 죄인인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이미 죄의 기운이 인간에게 퍼져 있다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아무 조건을 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준다고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마태복음 20:28)

그는 이 땅에 계실 때 실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았고 구약의 약속에 따라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도 함께 달린 강도 한 명을 구원했다.

이 강도는 평생 악한 짓만 한 사람이었는데, 자기의 죄를 회개할 때 예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구원의 말씀을 듣게 된다.

강도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교훈을 주신다.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받아주신다.'

십자가에 달린 흉악한 강도도 회개하여 구원받았다면 이 땅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오는 자를 내어 쫓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구원의 핵심 내용이다.

 

 

 

 

 

 

 

 

 

 

 

 

 

출처: 책 차마 신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